화티

언젠가는 꼭 화티*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다.
여태 쓸 일이 없었으니까. 무심코라도 입에 올릴 일이 없었다.
그만큼 효용이 낮은 단어지만 그 단어를 알게 된 뒤로 그 단어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나의 기억이 ‘화티’의 화티인 것이다.

초를 켠다. 초에 향을 댄다.
불에서 불을 옮기고, 그 연기의 움직임이 공간을 홀연히 메우도록 둔다.
자리에 앉는다.
기도를 하다 보면 문득 나의 소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대학시절에는 과제발표가 싫어서 학점도 포기하던 사람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목청이 커졌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리움을 알게 되어서가 아닐까. 그리워하면 부르게 되고, 부르면 만날 수 있다는 걸 믿게 되어서가.
코와 목은 빛과 향이 담긴 공기를 모으고 또 통과시키며 음을 뿜고, 마음이 마음을 증폭하는 기도의 시간 동안 나의 몸통은 마치 관악기 같다. 새벽을 깨우는 종 앞에서 모든 악기가 대포를 닮았다는 점 때문에 울었던 적이 있다. 무쇠와 나무토막과 석고와 구리와 바늘과 줄 따위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의 지점을 발견하기 위해 온 신경을 더듬는 인류의 노력이 전쟁처럼 헛되고도 치열하다는 생각에 아득해지는 날도 있다. 소리들은 어디로 갈까. 발음하는 즉시 사라지는 그 소리들은. 던지는 동시에 흩어지는, 매순간 생멸의 존재들. 소리들. 우리들. 그런 날에 나는 정말 세상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다.

얼마 전 우리는 차를 마셨다.
엄지손톱 크기의 납작한 네모꼴로 압축된 가루차로 아주 허술한 은박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그 차에게는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중앙에 희미하게 ‘茶‘라고 새겨진 살로나마 음용이라는 짐작이 가능한 검은 고체를 물에 넣으면 조각이 의심을 녹이며 우러난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 차를 좋아했다.
나는 차맛이 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 무미를 순수하다고 느낀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 맛이 나지 않으면서도 속을 무척 쓰리게 하는 악기능만큼은 놓지 않은 그 차를 그는 연거푸 마셨다. 차를 다 비우고 기다란 컵의 바닥이 드러나자 그는 말했다. 나중에 이렇게 죽고 싶다고. 무엇도 남기지 않은 채로. 화티. 누군가가 영영 떠나갈 때 너무 많이 울거나 주저앉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코 그의 편이다. 그건 정말로 그의 자유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가능한 한 그의 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오로지 가능성 때문 아닐까. 어느 곳을 향한 가능성인지는 저마다가 다르겠지만 나는 그저 매일 하늘을 보고 있다. 별과 달과 구름들. 쏟아지는 빗방울 속에서 햇빛을 느끼는 처마 밑이 혼자라도 행복하다. 그렇게, 사라졌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가려졌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들춰보면, 숨을 불어보면 다시금 살아나는 것들이 늘 있다. 저 하늘에도. 내 마음에도. 겨울에도. 여름에도. 죽음에도. 마지막에도. 지겹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이것이 세상의 비극인지도 모르지만 희망일 수도 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 세상의.


*화티는 ‘불씨를 저장하는 곳’ 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불이 귀한 시절에는 언제라도 불을 옮겨붙일 수 있도록 화티에 불씨를 살려두고 사시사철 보관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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