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이별하는 법

 모든 이별은 갑작스럽다. 물음표만 남는다. 나이를 먹어도 먹어도 똑같다. 왜일까?
 어느 날 나는 메일 한 통을 받는다. “책을 많이 사는 당신에게. 당신의 공간에 책이 있는 풍경을 (만일에서 산 책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묘사해주세요. 이때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해주세요. ⑴한정된 공간에서 어떻게 책을 보관하는지? ⑵이렇게 살다가는 책이 계속 늘어날 일만 있을 텐데, 추후 책 더미를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노력해보겠다고 한다.
 첨부된 파일을 실행하니 이제껏 내가 책방 만일에서 구입한 책들이 쏟아진다. 쓸데없이 많은 책을 산 것 같다. 제대로 읽지도 않는데. 아니지, ‘제대로 읽기’란 일종의 신화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말이다. 완독인가? 정독인가? 중독이면 몰라도…… 어느새 목록에서 오류를 찾아내 수정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나는 약간의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누락된 책들을 채워 넣는 것까지 기어이 완성하고 만다. 이제 이것들이 내 공간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말하면 된다.
 다만 기억의 저편에서 아른거리는 책 하나가 있다. 신경이 쓰인다. 이때쯤 혼잣말이 터진다. 펄럭인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는 좀 더 침묵에 가까웠는데…… 그것은 차츰 형체를 갖춘다. 끝내 여기 구입 목록에 오르지 못한 한 권의 책. 기회는 많았다. 돈은 그냥 있었고. 그러니까 내가 그걸 살 수 없었던 건 아니다. 스프레드시트의 빈칸을 바라보며 나는 머리를 긁적인다.
 그 책은 포코너스북스(Four Corners Books)가 퍼밀리어스 총서(Familiars series) 중 하나로 2008년에 발간한 브램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다. 퍼밀리어스 총서는 고전 문학을 재해석하는 기획으로, 그래픽 디자이너 존 모건과 변칙적인 시각 예술가가 협업한 결과물로 구성된다. 말하자면 해묵은 텍스트에 세련된 새 옷을 하나 혹은 그 이상 덧입히는 것이다. 시리즈는 총 13권이고, 『드라큘라』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책이다.
 나는 기억한다. 그 책을 처음 만난 순간을. 솔직히 전화번호부인 줄 알았다. 저게 왜 저기 있지? 하지만 곧 알아봤다. 오해가 빚어내는 사랑이 그러하듯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샛노란 하드커버 꼭대기에 시뻘건 성채처럼 각인된…… DRACULA…… 거대하고도 비밀스러운 판형과 투박하지만 손에 착 달라붙는 부피감…… 서늘하게 늘어선 서체가…… 피로 물든 책머리가…… 홀리 몰리……! 그날 밤 내면이 드러누웠다. 그 후로 자주 그것을 찾았다. 대체로 그것은 다른 원서들 틈에 있었는데, 어느 틈엔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다가 계산대 옆 작은 책장에 가 오래 있었다. 그 책은 한동안 그렇게 만일 안에서 자리를 옮기다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 사갔거나, 팔지 않기로 했거나,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왜 진작 그걸 사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불필요하다. 나는 이 문제를 설명해야 할 때마다 난처했는데 얼마 전 적당한 말을 찾고서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알코올에 자신의 삶을 의탁했던 에세이스트 캐럴라인 냅이 ‘갈망 대상’이라 부른 것과 비슷하다. 나는 냅과 마찬가지로 시시때때로 그것을 갈구했다. 그리고 오직 그것만이 시도 때도 없는 갈증을 해결해줄 거라 믿었다. 냅은 샀고 난 사지 않았지만, 그건 우리 둘의 성향 차이일 뿐이었다. 지나치게 경제적인 나와 과도하게 솔직했던 냅이랄까.
 자꾸만 그 책을 향해 책방을 찾던 무렵, 나는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그리 특별한 사연은 아니었다. 더러운 빨랫감처럼 뒤엉켜 널브러진 일감들…… 다 치운다고 나아질 리 없는 처우는 말할 것도 없고…… 날로 심해지는 편두통…… 지긋지긋한 망원동…… 코리아…… 고지서와 청첩장…… 차라리 관에 들어가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의 사소한 순간들마저 견디기 힘들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했다. 목적지는 없었다. 떠난다는 게 중요했다. 훌훌 털어버리고. 가진 것도 없으면서 미련 없이. 마지막 책 한 권 품에 안고서. 드라큘라 품에 안겨서. 나의 여권. 나의 구원자. 어디로 갔나요?
 사실 브램 스토커의 그 소설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읽어본 적이 없으니. 어렴풋이 전해 듣길 그것은 뱀파이어 이야기의 원조다. 아, 어렸을 때 영화로는 본 것 같다. 키아누 리브스의 얼굴 말고는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대신 다른 뱀파이어 이야기는 많이 안다. 가장 좋아하는 건 토니 스콧의 「악마의 키스(The Hunger)」와 캐서린 비글로우의 「죽음의 키스(Near Dark)」다. 두 영화 모두 뱀파이어와 머나먼 이별을 두려워하는 그들의 마음을 다룬다. 구원에 대한 갈망. 어둠에서 벗어나기. 그 반대일 수도 있나? 어쨌든 거기서 키스가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 오로지 영생이 주어진 주인공이 나온다는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을 뱀파이어 이야기의 변형으로 해석한다. 물론 올랜도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가 있지만. 샐리 포터가 각색하고 연출한 동명의 작품에서 올랜도는 끝내 나무 밑동에 기대어 천사의 노래를 듣는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내가 있나니♬” 그것은 올랜도 자신의 주제가이자 모두를 위하는 송가다. “나는 태어나고 죽는다네♪”
 그 밖에 내가 아는 모든 뱀파이어가 죽음을 면치 못하거나 거의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니, 유추하건대 『드라큘라』 역시 드라큘라가 죽고 끝나는 이야기가 분명하겠다. 하하.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아는 한, 좋은 이야기는 끝장난다. 그렇지 않나? 끝장나는 그런 좋은 이야기는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우리는 심각한 사건들을 통과해 처음과는 다른 곳에 속수무책으로 놓여버린다. 『드라큘라』가 마침내 우리에게 선사하는 풍경은 무엇일지 이제 제법 궁금하다. 모든 것엔 끝이 있다는 것? 우리는 언젠가 죽고 만다는 것? 제발 그런 시시한 종류의 깨우침만은 아니길. 이러나저러나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어디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지. 나는 망연자실 스프레드시트의 빈칸을 바라본다. 커서는 영원히 깜박이려고 한다.

*


책방 만일의 마지막 주간, 인사차 만일에 들른 나는 거짓말처럼 그 책과 재회하게 된다. 등 뒤에서 그 책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간다. 표지가 노랗고 크기가 커다란 그것은 그 책이 맞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이미 책을 쓰다듬고 있는 나의 하얀 손…… 그 책은 빛을 잃은 듯하다. 낡고 무딘 느낌이 든다. 그러니 웃기고 조금 슬픈 마음이 된다. 나는 이 마음을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말하고서 밖으로 나선다. 책방은 내일까지 열려 있다.


김홍구

만일에서 책을 많이 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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